The Other Public Space, Korean ‘-bang’ Culture
Germany-Korea Public Space Forum at DAM(deutsches Architektur Museum)
Frankfurt, 2006
seoul velocity
불과 50년 사이에 90만 인구에서 2,300만으로 성장한 600년 된 고도 서울수도권, 그리하여 다소 믿기 어렵겠지만 대한민국 인구(4,800만 명)의 절반에 다다른 거대인구가 전쟁처럼 거주하며 가용면적 인구밀도가 세계 최고가 되어버린 이곳은 소위 ‘초고속압축성장’이라는 단어로 요약된다. 도시의 얼굴이 인간의 마음보다 빨리 변한다는 보들레르의 한탄 섞인 감상은 서울시민에게는 일종의 4계절의 변화와 같은 자연 현상이다. 인간의 수명보다도 건물의 수명이 짧은 곳이 바로 서울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례적 과정이 당연히 가져오게 되는 예외성을 망각한 체, 도시의 퍼블릭스페이스가 어디에 형성 되어있을까를 찾아보며 고상하게 서울의 거리를 배회한들 이내 도심의 번잡함과 밀도의 치열함에 지치고, ‘퍼블릭스페이스 없음’이라는 허무한 결론을 내릴 수 밖에 없을 것이다. 한국의 퍼블릭스페이스를 논하기에는, 그 초점을 ‘어디에 퍼블릭스페이스가 있는가?’라는 시각에서 한참 선회하여 ‘퍼블릭스페이스에서 있을 법한 활동이 어디에서 일어나는가?’로 시선을 바꾸고 도시의 열린공간 보다는 닫힌공간, 즉 보이지 않는 내부에 천착하는 현명함이 필요하다. 하지만,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이러한 태도를 통해서 눈에 들어오게 되는 한국의 퍼블릭한 활동들과 참으로 독창적인 그 영역들은, 관찰자로 하여금 ‘이것이 과연 퍼블릭한가?’ 라는 반문을 남기며, 심지어는 ‘이것은 도대체 무엇인가?’라는 반복된 질문과 함께 엘리스의 원더랜드에 온듯한 혼돈에 빠지게 한다.
seoul = nothing? or something?
한국 대도시의 퍼블릭스페이스를 논하기에는, 그 도시와 도시 속의 삶을 배경으로 설명하지 않을 수가 없고, 사실 그것들을 설명하자니 이 원더랜드를 설명할 수가 없는 무능력에 도달한다. 결국은 단편적 에피소드들의 방대한 집적으로 밖에는 표현이 안되니 일찍이 벤야민이 논한 바와 같이 ‘나는 보여줄 것이 있을 뿐 말해줄 것은 없다’ 또는 ‘모든 사실이 이미 이론’이라는 태도가 무척이나 적합하고 매력적으로 들린다. 벤야민은 나폴리에서 공과 사가 난잡하게 융화되는 다공성을 목격했으며, 모스크바에서는 공공의 영역에서 사적활동이 일어나며 사적영역이 공공화되어버리는 아이러니를, 파리에서는 사적공간이 극단화되며 브루주아의 소비 전쟁터가 되어버린 상황과 파사젠베르크를 통해서는 대도시의 집단적 판타지를 목격하였다.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베를린에서의 유년시절을 언급하며 도시의 기억과 기억의 상실에 대해서 이야기 하였다. 그는 이 모든 도시의 현상을 진보의 이름이 남긴 ‘폐허’라는 단어로 요약하였다. 내가보기에 600년 된 고도가 불과 50년 사이에 2,300만의 인구규모로 성장한? 혹은 초토화된? 초고속압축성장의 도시 서울을 설명할 수 있는 가장 적합한 방식은 아마도 ‘벤야민이 논한 이 4개의 도시가 모두 서울에 뒤섞여있다’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서울은 이도저도 아닌 ‘Nothing’이 되는가 혹은 아주 특별한 ‘Something’이 되는가? 이 질문은 한국의 현대 지식인들에게 던져진 화두이다.
by-products
앞서 진술한 대한민국 근대화의 질주과정에서 ‘계획’은 결코 조심스러울 수 없었고 현실을 아우를 수도 없었다. 건축가의 ‘더딘’ 계획은 말할 것도 없고 도시계획가의 ‘조금 빠른’ 계획조차 너무나도 느렸다. 계획은 결국 도시행정가의 손에 의해 이루어졌으며 이들의 ‘계획’은 바로 ‘실행’을 의미할 정도로 빨랐다. 심지어는 실행함과 동시에 계획하는 태도가 만연했고 바람직하다고 여겨졌다. 하지만, 이 모든 계획의 속도가 현실의 속도를 능가할 수는 없었다. 결과적으로 현실은 언제나 계획을 앞질러갔고 계획은 언제나 현실을 외면해왔다. 이러한 좌충우돌의 과정 속에서 등장한 우연적 성과물들 중의 하나가 다름아닌, 한국의 퍼블릭스페이스가 아닌가 싶다.
한국의 퍼블릭스페이스가 거처하는 곳은 이 질주하는 근대화의 속도가 남긴 ‘부산물’ 속에서 비롯된다. 그리고 이 부산물의 상황에서 80년대 말부터 시작된 한국 퍼블릭스페이스의 독창성이 기록된다. 정리하자면, 한국의 퍼블릭스페이스는, 일제 강점기에 조성된 극히 미미한 몇몇을 제외하고는, 크게 다음의 두 가지 종류의 성과물들로 분류되는데 흥미로운 것은 이 성과물들이 모두 예정된 것이라기 보다는 다소 우발적이라는 점이다.
첫 번째의 우연적 성과물은 근대화의 핵심기제 즉, 토목공사들이 남긴 부산물적 상황에서 파생된, 도시의 활동적 공간과는 격리된 오픈스페이스들이다. 즉, 신설된 혹은 확장된 도로체계가 남긴 도심의 자투리 공간 혹은 하천 변 도로의 개설과 함께 치수(治水)의 필요성으로 생성된 고수부지 또는 철도의 폐선부지 등이 그것들인데, 이들은 90년대에 들어서며 도시행정가들의 주목을 받기 시작 했고 퍼블릭스페이스화 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맥락에서 가장 상징적인 것은 아마도 난지도공원일 것이다. 이곳은 80년대 말까지만 하더라도 서울의 대표적인 쓰레기하치장이었으며, 도시의 변방이던 그런 곳이었다. 저지대로서 수시로 침수되던 한강의 섬 난지도에는 70년대부터 쓰레기 하치가 자연발생적으로 시작되었고 90년대에 이르러 그 높이가 해발 97M에 달하며, 체적이 기자(Giza) 피라미드의 34배에 이르는 인공적 산을 형성하였다. 이 기간 동안 도시의 변방이던 이 하치장은 어느새 도시의 중앙으로 편입 되었다. 2002년 즈음에는 이곳의 평지부분이 월드컵경기장이 건설 되는 것과 함께 난지도의 쓰레기 산은 순식간 서울 최고의 공원으로 변신하였다. 이곳은 근대화의 가장 상징적인 부산물 즉, 쓰레기의 그칠 줄 모르는 축적이 빚어낸 한국 후기산업사회의 가장 화려한 변신이다.
토목공사가 만들어낸 부산물의 상황이 퍼블릭스페이스로 변신하는 것은 사실 이례적인 것은 아니며 서구에서는 종종 볼 수 있는 상황이다. 사실, 내가 가장 관심 있게 보고 있으며 또한 이 글에서 다루고자 하는 본론은 두 번째 종류의 퍼블릭스페이스 이다. 이것은 ‘bang’이라는 한국 특유의 실내공간이다. 이곳을 퍼블릭스페이스라는 하나의 의미로 규정하기에는 무리가 있는 것이 확실하지만 퍼블릭한 활동들이 일어난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이 또한 급속한 근대화의 과정이 파생시킨 부산물 속에 거처하는 것은 마찬가지이다(후에 기술하겠지만 이들은 ‘근생’이라는 한국 특유의 건축물 유형 속에 거처한다.). 하지만 이곳은 오픈스페이스와는 지극히 상반되는 ‘closed-space’이자 관습적인 공간관념에서 보았을 때는 심하게 ‘private space’라는 점이다. 그리고 바로 이곳에 한국 퍼블릭스페이스의 역설과 아이러니가 있으며 공적영역과 사적영역의 서구적 경계 관념을 무색하게 하는 한국의 전통적 습성이 또한 이곳에서 계승된다.
‘-bang’ culture intro.
pc 방 / 놀이방 / 다방 / 노래방 / 찜질방 / 비디오방 / 보드게임방 / 온라인방 / 휴게방 / 소주방 / 만화방 / 사주방 ……
지금 한국사회에서는 그 접미사가 ‘-방’으로 끝나는 각종의 시설들이 자연발생적으로 도시공간에 융성하고 있다. 한국의 전통주거에서 파생한 이 ‘-방’이라는 이름은 서구식으로 설명하자면 ‘room’이지만, room이 가지는 사적인 혹은 개인적인 내연(implication)과는 무척 다른 의미가 있다. 전통적으로 ‘방’은 사적 개인의 공간 이라기 보다는 ‘친밀한 유대’의 공간으로서 그 의미가 더욱 크기 때문이다. 프라이버시라는 개념은 불과 50년 전의 한국에는 존재하지도 않았다. 어쨌거나 급속한 근대화와 도시화의 시기를 거치며 발생한 한국주거문화의 감당할 수 없는 혁명적 변화는(이 또한 후에 기술하겠지만 한국사회 특유의 아파트문화를 의미한다.), 주거공간에 종속되어있던 ‘방’을 도시의 공간으로 추방(?)하였거나, 혹은 주거의 ‘방’이 도시 공간으로 가출(?)하였다는 것이 나의 가설이다. 아래에 소개하는 이 새로운 ‘-방’문화의 번성은, 한국사회가 1988년의 올림픽을 거치며 본격 진입한 소비사회와 맥락을 같이 하며 동시에 아파트라고 하는 거주의 형식이 지배적인 주거문화로 정착하는 것과 시기를 같이한다.
pc 방 : 90년대 초에 생기기 시작하여 불과 10년 사이 25,000여 개로 급증한 한국의 pc 방은 초창기 ‘인터넷카페’라고도 불리었다. 설치된 수 십대의 컴퓨터를 다양한 사용자들이 시간제로 이용하는 곳이다. 학업 및 업무를 보기도 하지만 인터넷을 이용하는 경우가 가장 많으며, 특히 온라인 게임의 용도가 가장 높다. 서울의 어디를 가든 발견되며, 한국이 초고속 인터넷 보급률 세계 1위를 기록하는 견인차 역할 또한 하였다. 하지만 이곳을 가상공간에 접속하는 분절된 개인의 공간 혹은 인터넷 접속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을 위한 기능적공간을 주된 것으로 이해하면 곤란하다. 이곳은 하나의 문화공간으로서 ‘친구’라고 불리는 젊은 세대들이 만나고 교류하는 공간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이 공간의 교류성이 없다면 각 가정에 어김없이 보급되어있는 컴퓨터와 인터넷을 두고 이곳에 모여들 이유가 없는 것이다.
다방 : 차를 파는 곳이지만, 차를 판다기 보다는 사람을 만나고 장시간 대화하는 장소이자 휴식을 취하는 장소로서의 의미가 더욱 크다. 60-70년대에는 거의 남성전용의 공간이었으며, 전통주거에 있었던 ‘사랑방’같은 남성전용공간이 급속한 도시화 과정에서 해체되고 집이 공간적으로 압축/축소 되어 남성의 공간이 가정에서 사라지며 생긴 대용물이라고 볼 수도 있다. 하지만, 80년대에 들어서는 다방이라는 이름 보다는 ‘카페’ 혹은 ‘커피샵’이라는 이름으로 좀더 현대화된 모습을 갖추었고 남성전용성은 사라지며 대학생을 비롯한 젊은 세대들의 가장 빈번한 만남의 장소이자 수다의 장소로 변모하였다. 수를 헤아리기 힘들 정도로 많은 이것은 도심 어디를 가든지 거리에서 쉽게 발견할 수 있다.
비디오방 : 이곳은 상상하기 힘들 정도로 좁은 방이다. 이곳을 들어서면 다시 수 십개의 쪼가리 방들로 나누어지는데, 이 방들의 크기는 약 5㎡에 불과하다. 이 방에서 비디오 혹은 DVD로 영화를 본다. 하지만 영화를 보는 목적은 부차적이라는 통념이 있다. 이곳은 사실 젋은 남녀가 스킨쉽을 나누며 연애를 하는 곳으로서의 역할이 크기 때문이다. 젊은 남녀가 어두운 밤 공원의 벤치에서 사랑을 나누는 장소가 실내로 대체되었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독서실, 고시원 : ‘실’은 또한 방과 같이 ‘room’으로서 번역된다. 독서실은 주로 중,고등학생들의 입시를 위한 공부의 장소이다. 이곳은 어두운 방안에 수십 혹은 수백개의 개인 파티션으로 구획된 책상들이 있으며 24시간 운영되는 일종의 자발적 감옥과 같은 곳이다. 한편, 고시원은 사법고시 등 각종 자격시험의 준비를 위한 곳으로 성인들이 많으며 독서실보다는 훨씬 본격적으로, 숙식까지 하며 수개월에 걸쳐서 거주하는, 공부하는 감옥과 다름 없는 곳이다. 이곳이 독서실과 또 다른 점은, 공간이 수십 개에 달하는 5㎡ 정도되는 극소의 방들로 구성되어 각각 독방생활을 한다는 점이다. 고시원은 꽤 많은 경우가 공부를 위한 목적과는 다르게 아예 거주의 용도로 불법적으로 쓰이는 경우도 있다. 어쨌거나 서울에 이러한 장소는 수도 없이 많다. 이러한 폐쇄적, 고립적 극단성들의 발생은, 공공도서관과 같은 공공시설의 부족함에서 비롯되는 상황뿐 만 아니라, 후에 논하겠지만 ‘초고속압축성장’의 과정에서 발생한 한국 주거공간의 특수성과 교육을 통한 치열한 지위상승의 욕구 그리고 급속한 대도시화의 과정에서 연원 하기도 한다.
온라인방 : 인터넷 상의 가상공간에서 태동한 방이다. 이것은 온라인 카페 혹은 온라인 클럽 이라고도 불리 우는데, 그 기술적인 첨단성은 세계에서 최고인 것으로 알고 있다. 한국의 멀지 않은 과거 즉, 전근대시기로부터 비롯하는 ‘친밀성 유대관계’, ‘공동체 문화’ 등을 바탕으로 온라인방 이라는 소통매체는 폭발적으로 증가하였다. 온라인방을 운영하는 싸이월드라는 한 업체는 가입자수가 1300만 명에 달하기도 하며, 이 업체의 온라인 방이 80만개에 이를 정도로 한국의 가상공간은 치열한 현실공간보다 더욱 뜨겁다. 요즘은 중국, 일본 등에 한국의 온라인방을 수출하고 있다. 세계적 수준을 달리는 한국의 IT산업은 그 첨단 기술성에 동양특유의 ‘친밀성’을 접목 함으로서 기하급수적으로 발전하고 있는 것이다. 더욱 흥미로운 것은 이러한 ‘온라인상의 방’들이 ‘오프라인의 방’들과 조우 함으로서 가속화된다는 점이다. 도시학계 또는 IT 학계에서 논쟁거리로 되고 있는 ‘온라인의 발전이 오프라인의 접촉을 경감시킬 것일까?’라는 의문은 한국에서는 우문인 것이다. 핸드폰의 카메라를 통한 즉각적 이미지 전달, 타이핑을 능가하는 속도의 문자메시지(최근 한국의 문자메시지 사용건수는 일반 통화건수를 능가하였다.), 일상화된 지리정보, 지역정보 등의 시스템이 온라인 방과 같은 인터넷 매체와 연계되어 삼성의 핸드폰 브랜드 ‘anycall’의 문자 그대로 처럼 언제나 어디서나 돌발적인 만남을 가능하게 하며 오프라인상의 접촉을 더욱 융성 시키고 있는 것이 한국의 일상이다. 사실 한국의 싸이버공간은 더 이상 ‘other public space’가 아니라 ‘major public space’이며, 이는 2002년 월드컵상황에서 보여진 400만 명의 거리응원 인파라는 상상을 초월하는 오프라인의 조직적 군중 모임을 가능하게 하였다.
이상에서 열거한 방들 이외에도, 한국에는 많은 방들이 존재하지만, 퍼블릭스페이스와의 유관성 속에서 그 독창성이 특별히 기록되는 두 개의 또 다른 ‘방’문화를 아래에 소개하고자 한다.
극한 속도의 두 얼굴 : 노래방 vs. 찜질방
<노래방>
노래방은 말 그 대로 노래를 하는 곳이지만 일본의 가라오케와는 확연히 구분된다. 일본의 가라오케가 오픈된 홀에서 차분하고 예의 바르게 관객과 연기자의 역할을 돌아가며 노래를 즐기는 자아도취의 공간이라 한다면, 한국의 노래방은 집단참여의 공간이자 집단도취의 공간이다. 이곳은 그 내부가 10여 개 혹은 그 이상의 폐쇄적인 쪼가리 방들로 구성되어 있다. 이 방들의 크기는 종류에 따라 9㎡ – 35㎡ 에 이른다. 이러한 노래방은 한국의 도시공간 어디에나 분포하며 3만여 개소에 달한다고 한다. 그리고 그 각각의 방 안에서는 ‘쉼 없는 노래의 연속’과 이 속도에 몰입하는 ‘집단’들의 과도한 일탈적 광경이 연출된다. 혼자 이곳을 찾아와 노래를 부르는 사람은 없다. 대체로 적게는 3인 크게는 20인 정도의 그룹이 이 방에 들어가 노래를 부른다. 이 공간의 본질은 사실 ‘노래’라기 보다는 ‘함께한다’라는 의식을 고양시키는 하나의 카니발이기 때문이다. 노래는 쉼이 없어야 한다. 시간제로 운영되는 이곳의 상황이(시간은 요금의 지불과 함께 노래기계에 입력된다.), 그 쉼 없음을 부추 키기도 하지만, 노래와 노래 사이의 간격이 발생시키는 침묵은 속도의 ‘정지’를 의미하고 이는 곳 집단몰입의 ‘각성’으로 이어지기 때문에, 노래의 정지는 서로간에 금기 시 된다. 노래는 계속되어야 한다. 그리고 이 노래의 끝은 속도의 이완과 함께하는 자연스러운 자발적 종료에 의하지 않는다. 예약된 시간의 강제성에 의한 즉, 노래기계 타이머의 정지에 의해 축제는 ‘절단’된다. 축제는 타의에 의해 종료되는 형식을 빌리는 것으로서, 속도의 이완과 자발적 종료를 회피하는 것이다.
사용의 가격대에 따라서 무척이나 상이하지만, 이곳의 인테리어는 대체적으로 대중문화의 키치적 속성이 극도로 발현되는 곳이라 볼 수 있겠다. 형광물질을 동원한 각종의 벽화, 천정화 그리고 현란한 조명, FRP로 가공된 인공자연과 알 수 없는 조형물 등등이 첨단의 디지털 노래기계 및 대형멀티스크린, PDP등의 환상적 영상들과 함께 어우러진다. 이 공간에서 테크놀러지는 철저하게 키치에 봉사한다. 테크놀로지의 기능적 첨단성의 신화는 결코 이 공간이 추구하는 집단주술의 신화적 힘을 압도하지는 못한다. 한국의 어느 대기업이 첨단의 음향적, 영상적 성과를 이루며 심혈을 기울여 개발한 노래기계가, 영세 중소기업에서 개발한 조악한 노래기계의 영업실적을 따라가지 못하고 시장에서 실패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이 영세 업체는 지금은 건실한 한국의 대표적 중소기업이 되었다).
요약하자면, 노래방에서 이루어지는 이러한 집단몰입은, ‘시간에 쫓김’이라는 조건을 내걸고 하는 ‘시간을 앞지르고자 하는’ 주술적 행위이자 하나의 의식(ritual)이다. 이곳은 끝없는 노래의 연속 즉, 질주하는 속도의 쾌감을 통해서 속도를 망각하고자 하는 곳이며 이미지의 현란함과 무한성을 통해서 한정된 공간을 집단적으로 초월하고자 하는 곳이다. 이곳의 시간적 공간적 테마는 ‘끝없음’이다. 이 집단은 이를 테면 극도로 한정된 ‘방’이라는 공간 속을 무한 질주하는 합법적 폭주족이다. 이렇게 끝없고자 하는 시간과 공간의 집단적 욕망이 어느 외부의 퍼블릭스페이스에서 가능할 수 있겠는가…? 극도의 유한성을 통하여 무한성을 성취하려는 ‘방’이라는 한국 퍼블릭스페이스(?)의 아이러니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찜질방>
한국어의 찜질은 일종의 사우나를 뜻한다. 상당한 고온의 실내공간에 머무르며 육신을 이완시키고 땀을 배출하여 신진대사를 활성화시키는 이러한 찜질이 건강에 좋다는 인식이 확산되며 90년대 후반에 찜질방이 하나 둘씩 도시공간에 생겨나기 시작하였다. 그 이후의 활발한 확산과 함께 이 찜질방은 과거의 대중탕 개념 및 각종의 서로다른 프로그램들과 기하급수적으로 이종결합 되었으며, 이제 찜질을 한다는 것은 무척이나 부차적인 목적이 되었다. 그 개소가 1600여 개에 달하는 현재 한국사회의 찜질방은 찜질방 이라는 명목을 유지할 뿐 실상 도심 속의 ‘거대한 휴게공간이자 문화공간’이 되어버린 셈이다. 이 찜질방은 기실 팽창 분열하는 한국 ‘방’문화의 총체이다. 이곳에 현대 한국의 모든 ‘방’이 집결 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찜질방’과 함께 이곳에는 ‘놀이방(유아 및 어린이들이 노는 곳)’, ‘노래방’, ‘pc방’, ‘영화방’, ‘만화방’, ‘게임방’, ‘세미나방(그룹으로 세미나를 하거나 회의를 곳)’, ‘달림방(일종의 헬스클럽)’, ‘수면실’ 등이 모두 모여있으며 또한 식당, 패스트푸드 점, 매점, 사우나 등등이 함께 결합되어있는 그야 말로의 ‘방 complex’ 이다. 이곳 또한 가격 대에 따른 다양한 그레이드가 존재하지만 24시간 운영되는 이곳은 대체적으로 5-10 달러이면 최소 하루는 머무를 수 있는 관계로 노래방과는 달리 시간의 쫓김이 없다. 이곳은 맨발의 좌식활동을 기본으로 한다. 입장과 함께 신발과 옷을 랔커에 보관하고 카운터에서 제공되는 유니폼을 입어야 한다. 노래방, pc방, 만화방과 식당등을 제외하면 대부분의 시설이 별도의 요금지불 없이 사용 가능하며, 식사등과 같은 필요에 따른 요금의 지불은 요즘에는 손목에 시계처럼 휴대하는 락커 열쇠를 이용한 승인에 의해 후불 정산된다.
보통의 ‘방’들이 연령대와 성별에 따라 그 사용자층이 한정되어있고 계층화되어 있다고 하면, 찜질방은 모든 세대와 성의 장벽을 초월한다. 이곳은 유아에서 시작하여, 청소년, 성인, 노인까지의 모든 다양한 세대를 포괄한다. 어찌 보면 지역공동체의 분열 이후 근 50년 만에 한국사회에서 유일하게 모든 세대가 한 장소에 모이는 특이한 경관이 이곳에서 연출된다 할 수 있겠다. 뿐만 아니라 가족, 연인, 청소년무리, 회사동료들, 마땅히 잘 곳 없는 사람 등등 그 구성원이 실로 다양하다. 이곳에서는 어느 곳에서나 잘 수 있으며, 어느 곳에서나 음식물을 먹을 수 있고, 어느 곳에서나 카드게임을 할 수 있으며, 어느 곳에서나 누워서 책을 볼 수도 있으며, 일을 할 수 있고, TV를 볼 수 있다. 이러한 활동의 무경계성으로 인해서, 각자의 집 안방을 한곳에 죄다 풀어 놓은 이례적인 경관이 또한 연출된다. 사적인 영역은 신발장과 락커에 국한될 뿐, 그 밖의 모든 사생활이 노출되어 다른 사생활과 뒤섞여있는 듯한 기이한 광경인 것이다. 속살을 드러내며 서로 모르는 수십 수 백명의 사람들이 다양한 자세로 방바닥에 모여 앉아 대형스크린을 통해 방영되는 TV드라마를 시청하기도 하는 이곳은 각종의 방중에서도 가장 이상스러운 방이다. 상식과 몰상식의 경계가 아주 ‘편안하게’ 허물어진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찜질방은 기존의 모든 사회적 규범과 가치의 표상들을 가로지르는 이상한 공간이기에 한국정부에서는 이러한 난데없는 시설의 확산에 대해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난감해 한다. 이곳에서는 유니폼을 입는 것과 함께 모든 개인의 사회적 표상이 사라지며 공간적 표상성도 해체되어, 한없는 ‘이완’ 이외의 마땅한 행동규범이 존재하지 않는다. 즉, 이곳은 의미의 zero 지점인 것이다. 우리는 이곳을 무엇이라 부를 수 있겠는가? 이곳은 각종의 인간군상이 동시 다발적으로 모여 여가를 즐긴다는 측면에서 하나의 광장이자 공원이다. 반면 실내공간인 이곳은 안방에서나 있을 법한 각종의 행태가 적나라하게 일어난다는 점에 있어서 집 밖에 존재하는 또 하나의 집이자 사적 공간이다. 그리고 우리는, 이러한 활동이 유니폼을 입은 익명성과 함께 집단적으로, 무계층적으로 일어난다는 점과 그 집단 체류성 등으로 인해서, 비유하자면 이곳을 ‘이완의 팔랑스테르’라 부를 수도 있겠다.
마치 집단적인 환각상태에 있는 듯한 이 원더랜드의 공간이 드러내는 시간성은 노래방이 보여주는 ‘질주’를 통한 속도의 망각과는 정반대의 지점에 놓여있다. 이곳은 한없는 ‘이완’과 극도의 ‘게으름’을 통해서 속도에 도전하고 이로서 시간과 공간을 망각하고자 하는 곳이기 때문이다. 이곳의 시간은 ‘앞지르기’ 보다는 무한히 ‘퇴행’ 함으로서 그 역할을 다한다. 결국 노래방과 찜질방은 한국사회의 극한 속도가 빚어내는, 근본은 같지만 그 양상이 서로 대립되는 두 개의 다른 얼굴인 셈이다.
‘APT’ : Seoul Residential Life
도대체 한국사회의 ‘집’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났길래 집 속에 있던 이러한 ‘방’들은 도시의 복잡한 미로 속으로 뿔뿔이 가출(?)하여 자신을 어둠 속에 은신하였는가? 이에 대한 나의 가설을 결론적으로 이야기하자면, 급격한 전통적 사회의 붕괴와 전에 없던 새로운 주거형식의 급진적 도입 그리고 이와 함께하는 도시 스케일의 혁명적 팽창과 밀도의 치열함으로부터 기인한다는 것이다.
한국민의 대부분은 이제 ‘아파트(APT)’라는 주거형식에 거주하거나 혹은 거주를 간절히 희망한다. 한국의 재벌기업들이 여지 없이 보유하고 있는 대형 건설회사들이 그 주요시장으로서 의존할 뿐만 아니라, 한국 정부가 극도로 진지하고 민감하게 수립하는 정책 중의 하나가 주택건설을 통한 주택보급이며, 이 주택의 건설이 곧 전적으로 아파트의 건설을 의미할 만큼 아파트라는 것은 한국사회의 지배적인 주거형식 임과 동시에 한국경제의 주요한 기반으로서의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한국 아파트의 주거형식은 사실, Ludwig Hilberseimer의 이미 오래된 사회주거 건물형식과 또한 이제는 진부하다 할 수 있는 C.A. Perry의 정주적 근린주구(Neighbourhood Unit) 단지계획 개념이 결부됨으로서 탄생하였지만, 그 결합의 과격함과 실행의 거대함이 그 진부함을 전혀 ‘새롭게’ 드러나도록 한다. 하나의 예로서 1988년 한국정부가 공표한 수도권 주택 200만호 건설이라는 사상 초유의 사업이 불과 4년 만에 초과달성 되었다는 사실만으로도 그 거대함과 속도의 급격함을 체감하기에는 충분할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태도와 더불어 생성되는 서울 주변의 각종 신도시들은 서울 수도권의 인구를 불과 50년 만에 전체 인구의 절반에 가까운 2,300만 인구의 거대 스케일 영역으로 탈바꿈 시키게 된 것이다. 이는 또한 ‘아파트’라는 것을 통한 ‘공급’의 전략이 얼마나 혁명적이었는가 하는 점과 진부의 ‘결합’이 얼마나 혁신적일 수 있는가를 여실히 보여준다. 이와 더불어 한국이 초고속 인터넷 보급률 1위를 달리고, 핸드폰 보급률 1위를 달리는 그 첨단 혁신성의 배경에는 아파트라는 이 진부한 동일패턴의 대량반복이 가져다 준 통신인프라 설치의 뛰어난 수월성 그리고 대도시의 복잡성과 원거리성 및 전통적 친밀유대관계의 요청에 부응하여 IT산업이 제공하는, 의사소통의 공간 초월성 등이 있다.
아파트의 보급을 통해서 한국의 주택 보급률은 이미 100%를 초과하였다. 이 주거형식의 과도한 확산은, ‘근대 건축은 실패하였다’라는 세계 건축계의 오래된 단정에 의기양양한 반문을 제기하지만, 자가주택보유율이 50%를 밑돈다는 사실을 파악하면 주택의 소유가 일부 계층에 편중되어있음을 알 수 있고 이는 아파트라는 부동산이 개인적 부의 축적을 위한 주요한 수단 임을 반증 함과 동시에 사회의 모든 가치가 아파트의 재화적 가치로 수렴되고 있음을 또한 반증한다(참고로 한국의 아파트는 공공기관에 의한 임대아파트가 아니라 대부분 건설 전에 분양되는 사유영역인 관계로 임대도 개인에 의해 이루어진다는 점을 밝힌다). 한국의 아파트는 서민만의 거주형식이 아니다. 이것은 오히려 중산층을 위한 주거공간으로 시작하여 이제는 사회 구성원 전 계층을 광범위하게 포괄하고 있다. 아파트의 가격은 지역과 평형에 따라서 천차만별을 이룬다. 강남(서울 한강의 이남지역)의 아파트 가격이 GNP를 감안하면 맨하탄 주거가격의 5배에 달한다는 점을 고려하면 한국사회에서 이 아파트라는 ‘집’이 가지는 위상의 첨예성을 더욱 쉽게 파악할 수 있다. 아파트의 소유에 대한 강렬한 집착은 정착에 대한 집착이다. 하지만 이는 계층적 정착을 의미할 뿐 결코 정주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더욱이 한국사회에 팽배한 지속적인 아파트 평수 늘리기 노력은 정주와는 한 참 동떨어진 ‘이주’를 가속화 시키고 있으며 일상화 시키고 있다. 그리고 이 이주의 수월성을 위하여 장소에 대한 애착은 금물인 것이다.
2000년대에 들어 아파트문화에 생긴 다소간의 변동과 함께, 그 유형이 초고층화, 복합화 되고 건축물의 모양과 형식이 상징자본의 흐름과 함께 계층적 변별성을 대변해가는 일부 경향이 생기기는 하지만, 대부분의 아파트는 현재에도 그 형식이 과거 바우하우스에서 시도했을 법한 급진적 사회주거의 외관과 형식을 취하고 있다. 즉, 똑같은 주거 유니트와 주거 동의 무수한 반복 및 누적의 점철인 것이다. 게다가 한국인 특유의 남향 주거 선호에 대한 한결 같은 집착과 최대한의 세대 수를 확보 하기 위한 치열한 노력은 이를 더욱 가속화 시키며, 단지의 경관을 마치 주거의 동들이 사열하는 듯한 천편일률적 장관을 연출토록 한다. ‘일조권’은 아파트 단지계획의 주거 동 배치에 있어서 최우선 선결 조건이기 때문이다.
‘마당’이라는 매개공간을 둘러싸고 개개의 공간 혹은 방들이 배치되었던 과거의 전통적 주거와 그 삶의 대가족적 복합성은, 순식간에 아파트의 단위세대라는 2차원적 평면 속으로 압축 축소되었고 전혀 다른 삶의 형식들을 강요하였다. 이 과정에서 발생하는 가족구성원들의 어색한 부대낌과 강요되는 한결 같은 삶의 형식들은 이들이, 애타게 찾던 따사로운 일조권을 포기 한 채, 도시의 ‘방’으로 은둔토록 한 것이 아닌가 싶다. 한국사회 ‘방’문화의 번성은 이 아파트라는 거주의 문화가 지배적 주거형식으로 정착하는 90년대 초의 상황과 시기를 같이한다. 또한 근린성의 급격한 해체와 이주문화의 가속화, 그리고 서울 스케일의 폭발적 팽창이 도시의 ‘방’문화를 번성 시킨 것이다.
정리하여 보자면 다음과 같다.
1. 급박한 변화의 속도 속에서 집 속의 방들은 불혐화음을 일으키며 도시를 향해서 가출하였다. 특히 ‘아파트’라는 거주의 문화가 사회적으로 정착해 가는 즈음에 방들의 가출은 급속화 되었고, 아파트 논리를 위시로 한 삼각관계 즉, 아파트-직장-학교라는 가치의 사슬에서 이루어지는 일견 합리적인 듯하지만 실상 불합리하고 권태로운 동일화의 폭력으로부터 ‘-방’들은 가출한 셈이다. 도시 속의 ‘-방’은 합리적인 듯한 우리 세상의 ‘외관’을 지탱시키는 가족구성원의 임시거처이자 은신처이며, 불합리가 해소되는 마지막 보루이다.
2. 서울의 방대한 스케일에서 비롯되는 주거와 직장, 주거와 학교 등의 원거리 성으로 인해서 주거의 역할을 대체하는 임시체류의 공간과 교류매개체적 공간이 급증하고 있다. 장소를 근거로 하는 근린성의 해체가 전혀 새로운 형태의 커뮤니티 공간을 파생시키는 것이다. 이것이 또한 ‘-방’ 문화현상 중의 하나이다. 따라서 공공의 공간이 터무니없이 부족한 서울이라는 거대도시는 도시의 ‘-방’을 스스로 창안 하였다. ‘-방’은 밀실로서 가장 사적이며, 사랑방으로서 가장 공공적이다. 방은 민간이 제공하는 도시의 사적인 공공공간이다.
3. 정착된 집(아파트)을 소유하기 위한 노력들은 아이러니컬하게도 부유하는‘-방’의 상황을 가속화 시키며 오히려 ‘우리는 집에 거주하는가 아니면 도시에 거주하는가?’ 하는 바람직한 의문을 낳는다. ‘집’이라는 사적공간과 그 사유성의 극단적 추구는 동시에 ‘-방’이라는 무수한 ‘무소유’의 공간을 창출하고 있다. ‘집’은 도시에 몸을 두고 있지만 도시를 떠나고자 하는 욕망이며 정착의 욕망이다. 이러한 모순은 해결되지 않는 갈등을 낳는다. ‘-방’들은 불온하게 집으로부터 가출하여 ‘방대한 도시 속에서의 삶’이라는 유목적 전술을 익히고 우리에게 유용성을 제공하며 ‘현대도시란 어떠해야 하는가’에 대한 하나의 교훈으로 다가오는 역설을 낳는다.
‘Keunseng’ : ‘-bang’ breeder. program incubator
그렇다면 이 가출한 도시의 ‘-방’들은 어디에 거처하는가? 결론적으로 이야기 하자면, 이것 또한 한국사회의 급진적 근대화가 남긴 의도치 않은 ‘부산물’ 속에 거처한다는 것이다.
한국건축의 보편사에서 항상 제외되었던 대표적인 시설이 있다. 이것은 미래를 제시 하려는 아무런 욕망을 드러내지도 않고 있으며 과거를 끌어올리며 권위를 회복하고자 하는 어떠한 의지도 없는, 그러나 한국의 급진적 도시형성에 상당한 기능과 영향력을 행사했던 ‘근린생활시설’(줄여서 ‘근생’이라 한다.) 이라는 건축유형이다. 근린생활시설은 C.A. Perry의 주거조닝 개념에서 유래한 것으로 근린주구, 근린분구, 인보구등의 공간단위에 적정량의 상업시설을 위치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명목상 근린(인근주거지역)을 지원하는 시설이지만, 결과적으론 근린과 아무런 상관이 없어졌다. 이유는, 현재 서울의 도시상황 내에서 장소를 근거로 하는 근린성은 거의 존재하고 있지 않을뿐더러, 모든 공간이(그 영역의 방대함에도 불구하고), 익명의 활동적 도시영역이 되어버리는 것과 함께, ‘서울’이라는 일반적 단어의 의미 속으로 흡수 되었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도시의 혁명적 팽창과 함께 수반되는 신중함의 결여와 양산에의 경도는 도시공간에 뜻밖의 건축적 유형을 창출한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유형 즉, 40 – 100평 정도의 필지에 들어서는 ‘근린생활시설’이라는 3-4층 규모의 소형 상업시설 건물들은 서울의 경우 전체 건물개소 중 92.7%라는 방대한 양에 이른다고 한다. 이 같은 배경의 단적인 예는 영동개발과 같은 경우이다(서울 한강의 이남지역). 과거 공영개발을 할 수 없었던 빈곤한 정부가 환지성을 높이기 위해서 3,000만 ㎡에 달하는 엄청난 영동지역의 면적을 일단의 대형 아파트단지들과 대형의 노변상업시설부지, 교육시설부지와 도로를 제외하고는 나머지 전 영역을 이와 같은 소형 필지의 바다처럼 잘게 쪼개 놓았으며 필지 개발의 주체를 모두 개인으로 돌려놓았다. 이러한 상황에서 근린생활시설이라는 본연의 이름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새로운 건축유형이 우연처럼 창출되었다.
이 건물은 기본적으로 임대건물이다. 이것은 건물이 들어서는 장소 및 경관과 그 안에 입주하게 될 시설들(프로그램)에는 관심이 없을 뿐만 아니라, 알 수도 없다. 설계과정에서도 그 안에 어떤 내용이 확정적으로 담기게 될 지를 전혀 모르기 때문에 내용과 형식의 일치는 의도조차 할 수 없는 것이다. 건물이 지어지고 나서도 프로그램의 불안정성은 계속된다. 오직 급변하는 프로그램의 ‘상황’만 있을 뿐이다. 이 유형은 건물의 생애 전 과정에 있어서 대단히 민첩하고 유연하다. 이 유형의 설계는 그것의 의뢰를 기점으로 2, 3주일이면 끝이 나고 준공은 특유의 철근콘크리트(reinforced concrete) 라멘구법으로, 3-5개월이면 완료된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이 유형의 최대장점은 건물의 준공 이후에 발휘되는, 변화에 대한 상황적응력이다. 이 건물에 있어서 소중한 것은 아무것도 없기 때문에 어떠한 변형도 거침이 없다. 이 건물은 그것이 표상 하는 무엇도, 주변으로부터 준거하는 혹은 반대로 거역하고자 하는 그 무엇도 없기 때문에 건축물이기보다는 오히려 ‘인프라스트럭쳐’에 가깝다. 그렇지만 결코 인프라스트럭쳐가 지니고 있는 의미의 연속성을 보유하고 있지 않다는 점에서 아무의 눈길도 끌지 않는다. 그리고 이 덕분에 이 시설은 무한한 의미의 자유를 구가한다. 대체로 그리고 요즘은(언제 바뀔지 모른다는 뜻에서), 이 건물에서는 다음과 같은 프로그램들로 구성된다.
24시간 편의점, 음식점, 부동산, 카페, pc방, 비디오대여점, 독서실, 단란주점, 사무실, 교회, 안마시술소, 24시간 찜질방, 유아원, 놀이방, 노래방, 호프집등등.
대부분의 ‘-방’들이 이곳에 거처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시설의 프로그램이 가진 불안정성과역동성에서 비롯되는 새로운 프로그램들의 독창적 및 우발적 생성들에 견주어 나는 이 시설을 ‘bang breeder’ 혹은 ‘program incubator’라고 명명한다. 이곳에 거처하는 다양한 ‘-방’들은 말하자면 ‘내부로 폭발하는 스펰타클(implosive spectacle)’ 이기에 그 건물의 외관은 마치 이 방들의 분비물이나 폭발의 잔해물 처럼 보인다. 상식적으로는 하나의 줄거리 내에서 계열화되지 않는 이 프로그램들은 근린생활시설이라는 건물의 묶음으로 온 도시에 ‘픽셀’처럼 퍼져있다. 그리고 근생에는 주종의 프로그램이 없으며 모두가 부수적이다. 따라서 모두가 ‘기생’하는 듯한 임시적 태도를 취하는 것이다.
이 시설은 근대의 조건 즉 ‘속도’, ‘평준화’, ‘양산’이라는 테마를 정부가 아닌 개인차원의 개발을 통해 이루어낸다는 점에서 출발했다. 그리고 사실 이 세 가지 조건을 모두 훌륭하게 충족시켜 주었지만, 그 테마의 내면에 가장 중요하게 자리잡고 있는 ‘과거와 미래로의 구속 혹은 지향’에 대한 지독한 무관심으로 인해 규범도 질서도 그리고 취향조차 없는 입장을 취하고 있다. 그리고 이것들은 근대가 추구하는 균질성과는 정반대로 다양성과 이질성을 강력하게 흡수하며 동시에 너무나도 생생하게 그것들을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이 지나친 생생함이 주는 무안한 감정은 이 시설을 항상 사회의 골치 덩어리로만 여기게 한다. 그렇지만 이러한 탈계열화는 도시의 주변성, 분절성, 산발성을 극대화시킨다. 건전과 퇴폐, 규범과 위반, 질서와 일탈은 하나의 공간 경험에서 무수히 교차되며 근대가 억압하는 경직성을 극복하고 지나치다 싶은 유연성과 자치성을 획득하는 특이한 사례들 또한 보여주는 것이다.
우리의 도시와 도시구성원의 생활은 아파트의 현상에서 보여지는 것과 같은‘똑같음’의 추구 끝에서 발생하는 무수한 이질성의 아이러니를 경험하고 있다. ‘똑같음’의 추구는 인구의 절반을 서울이라는 일개 도시에 집중시키고, 결국 중심에 있는 모두를 주변화 시키며 ‘정처없이’ 만들어 버렸다. 이런 과정에서 도심의 경관은 이질성의 무수한 나열로 재현되고, 그 지리멸렬함을 거추장스럽게 드러낸다. 어디를 가나 한결같은 거추장스러움의 정서를 느낄 수 있고, 어디를 가나 이질적 주변에 위치한 것 같은 불안정성을 경험할 수 있다. 이러한 경험은 또한, 대체적으로 대형 아파트단지 부근의 이면도로, 업무시설이 밀집한 지역의 이면도로 그리고 학교시설이 위치한 지역의 이면도로 등에서 극대화된다. 즉, 전면과 이면의 괴리 속에 이 ‘-방’문화는 거대한 종양처럼 번식하는 것이다. 거추장스러움과 불안정한 경험의 점철은 ‘공간과 시간의 망각’ 이라는 주제를 중요하게 대두시킨다. 그리고 우리의 시선이 폐쇄적 내부를 지향하도록 하였다. 이러한 태도가 건물의 외관과 신체 감각의 불안정성을 더욱 불편 없이 가속화 시키는 것이다.
결국, 한국의 근생 건물들과 이에 거처하는 각종의 현란한 ‘-방’들은 업무, 학교, 아파트단지의 획일성과 균질성에 대한 하나의 ‘거울 이미지’이다. 그리고 이곳에 한국사회를 대변하는 역동성과 불안정성이 존재한다. 이는 르페브르(Lefebvre)가 ‘추상공간(abstract space)’에서 논한 바와 같이 ‘균질적, 보편적 공간은 아무리 거대한 전체로 통합하려 해도, 부서진 파편이 되고 마는 스스로의 모순적 상황에 놓여 있다’라는 점을 여실히 증명한다. 그리고 또한 그가 이야기한 바와 같이 우리는 이 통제할 수 없는 파편화의 ‘틈새’가 가지는 가능성을 볼 수도 있겠다. 즉, 이 파편화되고 이질화된 공간이 보여주는 유동성과 불명확성, 일탈성, 상황성, 합법과 불법의 경계성, 의미의 가로지름등을 하나의 가능성으로 볼 수도 있다는 것이다. 가능성에는 언제나 위험이 수반된다는 사실만 인정한다면 말이다.
plaza, square, park vs. ‘-bang’ : 한국 퍼블릭스페이스의 역설과 아이러니
불과 50년 만에 인구 2,300만의 대도시로 폭발 팽창한 서울의 도시화 과정에서, 당시의 정부가 도심의 오픈스페이스를 비롯한 퍼블릭스페이스를 고민한다는 것은 관용적으로 되돌아 보건 데 능력 밖의 상황이었을 뿐만 아니라, 당시에 과연 프라이버시라는 개념이 있기나 하였는지 의문스럽고 따라서 퍼블릭스페이스라는 개념 또한 마찬가지였으리라고 본다. 부지불식간에 등장한 ‘메트로폴리스’라는 알 수 없는 상대와 당시의 군사정부가 모토로 내걸긴 했지만, 금시초문과 다름없는 ‘근대화’ 라는 단어 앞에서 행할 수 있고 목표할 수 있었던 것은 오직 토목적 도시기능의 개선과 주택 등을 비롯한 물량공급이었으며, GNP의 혁명적 달성을 통해 정권의 정당성을 증명하는 것이었으리라 본다. 이는 실로 전사적으로 달성되었다.
이러한 정황과 함께, 서울의 외부공간은 매개영역이라 할 수 있는 퍼블릭스페이스의 부재 속에서 사유지영역과 도로를 비롯한 도시기능영역이 절충 과정 없이 그대로 충돌 하고 마는 전쟁터와 같이 되었다. 그리고 서구의 퍼블릭한 영역이 소화할 법한 각종의 활동들과 요구들 그리고 오픈스페이스의 한가함은, 서울에서는 도시의 외부에 대하여 극단적으로 등을 돌린 체 건물의 내부를 지향했으며, 이러한 요구들을 파악한 국소 자본의 교묘하고 비공식적인 흐름들이 특정의 프로그램들을 생성시키며 그 요구에 조응하고 또한 그 요구들을 해소하는 하나의 장치로서 집 속의 ‘-방’을 남다르게 변형시켜 도시공간 속으로 소환 한 것이다.
그렇다고 서울에 광장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예를 들면, 서울 한강의 여의도라는 섬에 조성된 40만㎡에 달하는 5.16광장 이라는 것도 있었다. 이 명칭은 60, 70년대의 근대화를 전사적으로 이룩한 군사정권의 쿠테타 날을 기념하는 데서 비롯되었다. 이곳은 40만㎡ 전 영역이 군더더기 하나 없는 아스팔트로 조성되어 있었으니 그 개방성과 장대함은 쉽게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이곳은 사실 광장이라기 보다는 고속도로와 같은 인프라스트럭쳐의 한국적 번안이다. 그리고 이 사실이 이곳의 외연(denotation)이자 동시에 그 내연(connotation)인 것이다. 하지만 이곳은 90년대에, 군사정권이 막을 내리며 등장한 문민정부에 의해 전 영역이 순식간에 녹지공원으로 탈바꿈 되었다. 즉, 광장을 폐기한 것이다. 우리는 이제 이곳을 ‘여의도 공원’이라 부른다. 이러한 새 정부가 시도한 공간 의미의 전복은 한 때 광장이 한국민에게 있어서 공포의 대상이자 억압의 상징이었음을 잘 보여준다. 한국의 초, 중, 고등학교를 들어서게 되면 여지없이 마주치는 운동장이라는 ‘밝은’ 오픈스페이스와 ‘탁 트인’ 광장은 훈육의 공간이었으며 군사문화와 집단주의 문화를 위해 필요로 하게 된 문화 인프라를 토목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실지로 70년대에 5.16광장을 비롯한 엄청난 건설사업들을 시행한 한 서울 시장은(그는 별명이 ‘불도저 시장’이라고 통하였다.), ‘시공은 예술이다’라는 유명한 표어를 만들기도 했으니, 건설과 토목공사를 대하는 태도는 마치 광기 섞인 예술가적 태도였던 것이며, 이는 ‘밝음의 광기’를 잘 대변한다. 어쨌거나, 중요한 것은 이러한 광장 공포의 상황이 그리 먼 과거의 일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이는 한국사회 특유의 ‘밀실 지향성’과 ‘어두운’ 방문화 확산의 저변에 깔린 또 하나의 심리적 지층이다. 그리고 한국 퍼블릭스페이스의 역설과 아이러니 또한 이로부터 비롯된다.
한국의 ‘초고속압축성장’은, 후기산업사회의 도래와 함께 서구에 비하면 때늦은 감(?)이 있지만 급속하게 확산되는 개인주의와 여전히 주요하게 잔존하는 집단주의 정서 및 공동체문화 등과의 시기적 중첩과 동시적 발현을 초래한다. 이러한 사정은 앞서 말한 한국사회 특유의 IT문화를 형성하기도하고, 2002년도의 월드컵과 같은 자발적이고 조직적인 거대군중의 집단 주술적 거리 응원 상황을 만들어 내기도 했으며 또한 특유의 ‘-방’문화를 형성하기도 하였다. 노래방이 개인주의적 욕망과 집단주의의 문화 사이에서 비롯되는 사회가 내포하는 각종의 갈등을 집단몰입의 숨가쁜 주술의식을 통해 순식간에 봉합 시키려 하는 그러한 곳이었다면, 찜질방은 이완을 통한 갈등의 화해 혹은 휴전의 영역인 셈이고, 한국사회의 속도가 파생시키는 다름아닌 ‘피로’가 이들을 매개하고 있는 것이다. 한국의 어느 도시인류학자는, 이 ‘-방’문화가 가진 ‘봉합’ 및 ‘휴전’의 성격이 없었다면 심리치료사도 신통히 없는 한국의 실정에서 이 사회가 집단 정신분열을 초래했을 수도 있다며, 이 ‘-방’을 구세주라고 칭하기도 한다.
퍼블릭스페이스가 참으로 부족한 한국의 퍼블릭한 활동들의 독창성은, 공간적으로는 무한한 도시의 외부를 등지고 유한한 ‘-방’을 선택하였다는 점이다. 즉, 극소의 유한성을 선택 함으로서 속도와 공간을 초월하고, 번거로운 대화 없이도 주술을 통하여 그 소통을 가능하게 하여, 종국적으로 추구하는 그 무형성과 무한성을 획득하려 했다는 것이다. 외부에 등을 돌린 극단성은 이를 지극히 프라이빗한 외양으로 드러나도록 하지만 퍼블릭하며 동시에 프라이빗한 공간을 필요로 하는 데서 비롯된 현대 한국 ‘방’의 태생성은 이 공간을 결국은 프라이빗도 퍼블릭도 아닌 알 수 없는 영역으로 만들었다는 것이 특기할 만하다.
그리고 이러한 방이 거처하는 ‘근생’은, 들뢰즈의 표현을 빌리자면 홈패인(le strie´) 도시공간을 파고들며 증식하는 한 없이 매끄러운(le lisse) 공간인 것이다. 근생과 그 건축물 내에서 이루어지는 프로그램적 활동들이 합법과 불법의 경계영역에서 발생하는 관계로 비교적 이곳은 제도적 규제성과 구속성을 가로지르며, 이를 위한 수단으로서 공간적, 프로그램적 fluidity를 생명으로 한다. ‘근생’이 차지하는 이 유동성은 참으로 독특하다. 이 유동성은 결코 개방적 혹은 유선형적, bloppy한 공간 연속성에서 획득되는 것이 아니다. 아이러니컬하게도 극도의 분절성과 보이지 않는 폐쇄성 그리고 ‘-방’이라는 극소의 negative box 속에서 성취되기 때문이다. 방은 외부의 개념이 없는 오로지 내부이다. 그리고 이 자그마한 프로그램들은 마치 ‘리좀’과 같이 끊임없이 이종결합하며 상황에 따라 새로운 프로그램들을 태생시키고 또한 소멸 시킨다는 점에서 더욱 그러하다.
한국의 ‘-방’문화는 상업시설이다. 이곳은 상품을 소비하는 곳이 아니라 ‘상황’을 소비하는 곳이다. 어쩌면 이 한국의 ‘-방’들을, 상황을 소비하는 상업공간이라는 점에서, 축제를 일상으로 삼는 픽셀화 된 theme park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자본의 흐름은 지치고 피로하며 동시에 권태로운 일상의 일탈 욕구를 포착하고 ‘방’이라는 공간을 생성시키며 부단하게도 일탈을 다시 또 하나의 일상으로 환원시키는 측면이 있다. 하지만 이것이 지루한 일상이 되는 순간 ‘-방’은 소멸할 것이다. 따라서 ‘-방’은 끊임없이 진화한다. 내가 글을 쓰고 있는 이 시점에도 왕성하게 진행되고 있는 ‘-방’의 진화와 그 진화의 속도는 참으로 놀랍고 경이롭다. 그렇다고 한국의 ‘-방’을 단순하게 후기산업사회의 자본의 흐름을 선도하는 상업시설로서 명명하기에는 커다란 어려움이 있다. 한국 ‘방’들의 대부분은 그 방들이 지칭하는 프로그램의 명목보다는 이로부터 비롯되는 집단 교류성, 자발적 이벤트성과 일탈성, 체류성과 같은 부수적 효과의 역할이 ‘-방’의 명목을 지배하기 때문이다. 즉 이 부수적 효과가 없다면 ‘-방’은 그 생명을 유지하지 못한다. 또한 이러한 점은, 현대 서구의 치밀하게 각본 되고 조직화된 대형 상업공간들이 보여주는 pseudo-public space 와는 선명히 대별되도록 한다.
우리는 ‘-방’을, 건전과 퇴폐의 교차 지점이라는 점에서 그리고 합법과 불법, 규범과 위반, 일상과 일탈, 정상과 광기의 경계영역 이자 더욱 크게는 유대관계를 확인하는 비공식적 모임의 공간이고 하나의 interior square라는 점에서, ‘other public space’ 라고 부르는 것이 적합하지 않을까 싶다.
이 글을 쓰며 한국의 ‘-방’문화와 그 도시성을 설명하려는 나의 노력은, 사실 적지 않은 설명에도 불구하고 너무나도 불충분하다. 그리고 이론적으로 명쾌 하려 해도 도무지 그럴 수가 없는 무능력에 도달한다. 그래서 더욱 장황해 지고 싶은지도 모르겠다. 추상적으로 설명하자니 너무나도 많은 것을 잃어버릴 뿐만 아니라 그 본질을 놓쳐버리는 것 같고, 구체적으로 설명하자니 에피소드들의 끝도 없는 나열이 될 뿐이다. 한국에 이러한 속담이 있다. ‘백문이 불여 일견’ 즉, 백 번 물어보는 것이 한 번 보는 것만 못하다는 말이다. 벤야민이 말한 바와 같이, ‘나는 보여줄 것이 있을 뿐 말해줄 것은 없다’ 또는 ‘모든 사실이 이미 이론’이라는 태도가 다시 절실해질 뿐이다.
아래에 나와 나의 친구들이 함께 작업한 하나의 프로젝트를 소개하며 나의 글을 마감하고자 한다.
another bang project, Chungmuro Intermedia Playground
6개의 방과 그 단속적(斷續旳) 관계
서울의 도심, 충무로라는 지하철역사 내에 있는 폭 6M, 길이 70M에 달하는, 그간 별 효용성이 없었던 지하 환승통로를, 서울시는 독립영화협회에서 운영하는 일종의 영상 편의시설로서 할애해주겠다고 하였다. 참고로 충무로는 한국 영화산업의 메카이다. 독립영화협회는 우리에게 이 프로젝트의 설계를 의뢰하였고(이 프로젝트는 내가 조민석, James Slade 와 함께한 공동작업이다), 우리는 무미건조하고 균질적인 70M의 기능주의적 공간 그러나 전혀 기능적이지 못했던 그 공간을 난도질하여 6개의 방으로 조각 내었다. 이 프로wpr트 역시 근대의 전형적 인프라스트럭쳐인 지하철이 만들어낸 부산물적 공간에 위치하게 된 것이다. 이 방들의 프로그램은 활력놀이터(휴게공간), 활력극장, 활력작업장(영상교육 및 편집실) 및 활력동사무소(사무실), 활력비디오방, 클럽활력(잡지열람 및 모임공간) 그리고 쇼룸(전시공간)으로 구성되어있다. 그리고 여기서는 보이지 않지만 또한 활발하게 활용되는 이 연구소의 online-bang (website)이 있다. 이 연구소는 이 온라인과 오프라인의 연동으로 왕성하게 활성화 되었다.
조각난 6개의 방들은 이렇게 각자가 서로 다른 프로그램과 이질적 성격들을 가지고 있으며, 서로가 무관하고 동시에 유관하다. 즉, 그 상관성 여부는 다름 아닌 사용자의 활동 행태에 의해서 공간의 관계가 변형되며 새롭게 결정되기 때문이다. 이것이 가능한 것은 각 방을 구획하는 대부분의 요소들이 가변적이기 때문이다(sliding walls & pivot hinge walls). 이로 인해 각각의 방들은 연속 되기도 하며 동시에 차단 되기도 하는 단속적 관계가 형성된다. 방과 방 사이의 절충은 없다. 하지만 그 ‘다름’의 덕분에 각 공간(방) 간에는 상당히 활력적인 인터랙션이 일어나고 있다. 활력연구소(intermedia playground)라는 명칭이 내포하듯이 이곳은 활력적이기도 하며, 또한 이 연구소가 자신들의 아이콘으로 응용한 이발소 간판이 내포하듯이 이완된 성격이기도 하다(한국의 이발소는 또 하나의 밀실적 방 문화로서 머리를 깍는다는 것은 지극히 부차적이며, 한 없는 이완 속에서 마사지를 받으며 휴식을 취하는 다소 퇴폐적인 공간이다. 이 연구소는 이 아이콘을 코믹하게 차용한 것이다.). 이곳은 또한 개인적이기도 하며 집단적이기도 하다. 이곳은 지하철 내에서 대단히 이질적이지만 그 덕분에 많은 사람들을 inviting하며 따라서 포괄적이다. 지나가는 아주머니 및 어른들도 편하게 이곳에 와서 쉬며 신발을 벗은 체 서로 수다를 나누는 모습을 자주 볼 수 있다.